• 소식
  • 보도자료·논평
  • 대변인

대변인

국민의힘 대변인 공식 논평 및 보도자료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 한국대학생포럼 토크 콘서트 주요내용[보도자료]
작성일 2012-11-15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2012. 11. 15(목) 19:00, 건국대 세천년관에서 열린 한국대학생포럼 토크 콘서트에 참석했다. 그 주요내용에 대해 황천모 수석부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Ⅰ. 인생그래프 코너 -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이야기

 

ㅇ 최근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Q1.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 궁금하다.

- 여기 계신 대학생 여러분들은 짐작은 하실지 모르겠지만 몸이 10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무척 바쁘게 지내고 있다. 지방에 가는 일도 많고 거의 매일 왔다갔다 하는 경우도 있다. 공약 같은거 잘 다듬기 위해서 준비하고 자료도 많이 보고, 많은 분들 만나고 하니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바쁘게 살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ㅇ 어린시절을 이야기 하다.

 

Q1. 대통령 딸로서 많은 주목을 받았을텐데 어떠했는가. 

- 별로 그렇게 그러니까 주목도 많이 받고 특별하게 살지 않았을까 선입견 갖기가 쉽다. 제가 반대입장이라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할 텐데 실제로는 특별한 게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갑자기 대통령되시고, 청와대들어가서도 많이 달라진 게 제 기억엔 없었다. 특히 어머니 교육이 청와대생활을 하더라도 중류가정의 평범한 생활을 하도록 하셨고, 저도 버스타고 다니고, 전철타고 다니고, 옷도 특별한 걸로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 임기가 끝나면 청와대에서 조그마한 집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그래서 특별히 청와대 생활이 특별했다는 느낌이나 기억이 없다. 오히려 어머니가 근검절약하시고 전기불 켜있어도 끄고, 여름에도 에어콘을 늘 켜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오실 때만 켜고, 아버지도 부채로 하셨다. 그땐 전기를 아껴야 할때였다. 또 전력난이 심했다, 가뭄이 들었다 하면 가족휴가를 취소했다. 그런식으로 했기 때문에 어릴때 부모님한테 받은 교육은 일생을 가는 것같다. 지금도 제가 어디가다가 손씻는데서 물이 졸졸졸 흐르면 제 집이 아닌데도 가서 다 잠그고 전기가 켜 있으면 끄고 그렇게 하게 되서 특별한 기억이 없다.

 

Q2. 떡볶기도 먹고 술래잡기도 했는가.

- 친구들하고 학교에서 오면서 호떡도 사먹고 그랬다. 그때 호떡을 많이 사먹어서 그런지 지금도 그 호떡집앞을 그냥 못지나간다.


Q3. 이목을 끄는 위치에서 마음불편하지 않았는가.

- 오히려 마음 불편한다기 보다도 내가 좀 모든 것을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어린마음에도 있었던 것 같다. 괜히 부모님께 누가될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자기 스스로 행실을 여러 가지로 조심하면서 한번 더 생각하고 말을 한다거나, 그런게 습관화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ㅇ 청와대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Q4. 청와대 일상은 어떠했는가.

- 학교 다닐 때는 학생이니까 별로 다른게 없다. 제가 대학 다니면서 대학생활은 아침 8시부터 몇시까지 이렇게 정해져 있지 않고 오후에 나가기도 하여 좀 자유스러웠다.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 그땐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니까 어머니하고 대화를 참많이 나눴다. 난지촌에 가서 여러 가지 노력도 하시고 새마을 지도자도 만나시고, 오는 손님들을 만났다고 하는 이런  대화를 했다거나 그런이야기를 딸한테 대학생이고 하니까 많이 해주셨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학생 졸업을 하자마자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맡으셨던 무거운 책임, 그게 저한테 떨어졌다. 사실은 그때 어머니가 갑자기 흉탄에 돌아가시고는 그 슬픔이라든가, 그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은 표현이 사실 안된다. 어떤 때는 제 가슴이 뻥 뚤려서 바람이 여기서부터 여기로 지나가는, 속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냥 하여튼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그랬는데, 그때 그래서 사실 정치하면서 항상 내가 한번 국민들께 보답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맡아서 이것을 꿋꿋하게 해내야했다, 갈 길까지 제시하는 국민들 덕분에 제가 거의 쓰러질 뻔했고, 거의 정신이 돌아버릴 뻔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 엄청나게 슬퍼하는 국민들을 보고, 제 사명도 느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제가 일기장에 적었지만 내가 이 빈자리를 채워야한다는 그 생각을 하면서 슬픔을 이길 수 있었다. 여러분이 생각하신 것 같이 글래머러스한 그런게 별로 없고, 지금생각봐도 그 시절이 마음이 아프다.

 

Q5. 퍼스트레이디업무는 어떠했는가.

-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했다. 당연하지만. 외국에 많은 손님들이 오셨다. 국빈들이, 총리내외분, 많은 외국손님들이 오셨는데 어머니가 접견도하셨고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준비하셨고, 어머니가 하셨던 일을 제가 다 맡아서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항시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회적으로 좀 어렵고 저소득층의 힘들고 어려운 분들, 노숙자, 나환자촌의 자립을 위해서 노력하셨다. 하여튼 그런 여성근로자나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찾아다니면서 자립하도록 용기를 주려고 하면서, 필요한 것은 지원도 하셨다. 또 문화예술인들도 도와주셨다. 뒤에서 조용히. 여러 가지 하시는 일들을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자랐기 때문에 저도 어머니 뜻을 이어서 연말에 노숙자 그런 분들 찾아가서 위로하고, 연말에 정성도 전하고 그런 일들을 많이 했다.

 

ㅇ 대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Q6. 대입준비는 어떻게 했는가.

- 한마디로 벼락치기는 제 스타일이 아니다.배운 것을 복습하고, 그렇게 꾸준히 했다. 시험을 앞두고 막 요란스럽게 하지는 않았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서 그때는 집중적으로 했지만 평소에 많이 했다.

 

Q7.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했는데 전공결정은 어떻게 했는가.

- 청와대라는 곳이 사실은 나라의 앞날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는 곳이다. 식탁에 손님들이 오셔서 둘러앉아서 어머니, 아버지하고 같이 밥을 먹어도 손님들이 하시는 얘기를 계속 듣게 된다. 우리나라의 장래가 있고, 그런 애기가 많았다. 그때 우리나라가 주목했던 사업이 전자산업이다. 지금 사실은 IT산업이 한국 발전에 굉장히 큰 역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하고 있지만 그때 전자산업l라는 것은 갓난 애기같이 초보단계였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맞았다. 공해도 없고 우리국민들이 손재주도 좋고, 조립도 많이했다. 부피가 많이 나가는 것을 파는 것보다 트렌지스트 라디오를 몇 개를 팔면은 그것에 못지않게 수익이 나고, 주목을 많이 하게 됐다.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전자산업의 역군이 돼서 발전에 이바지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다. 그것이 제가 이공계로 바꾸고 택하게 된 이유이다. \.

 

Q8. 캠퍼스 커플을 해본 적이 있는가.

- 그런 것은 없었다. 여학생이 한명 더 있었는데 중간에 유학을 갔다. 혼자 남았고 남학생들이 참 친절하게 해줬다. CC는 없었고 그렇게 공부가 많이 힘들었다. 열심히 공부하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추억거리 만들고 좀 여러 가지로 재미나는 것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든다.

 

Q9. 생활 통제가 있었을 텐데 MT나 동아리활동을 해본 적이 있는가.

- 그런 기억은 별로 없다. 나머지는 보통학생들하고 똑같이 했다. 지금 거기 학교근처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왕자다방이라고 하는 곳을 들어가면 몸에 며칠 동안 담배연기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자옥했다. 그런 다방에 가서 커피도 마셨다, 지금 커피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지금은 너무 향도 좋은데, 그 당시 커피는 그랬다.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학생활 했고, 축제가 있을 때 유일한 여학생이라서 앞장서서 피켓을 드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Q10. 요즘 대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 시절 대학생활은 지금 돌이켜 보면 낭만 적이었다. 지금 우리학생들보면 그런 것이 많이 사라졌다. 현실이 어려워서 굉장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절이 황금같이 소중한 시간인데 멀리서 보니까, 그때 그 시절로부터 이렇게 떨어져서 보니까 그때 그 시절이 소중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학생여러분이 미래에 무엇을 할것인가, 또 무엇을 하면 몰두하고 잘 할 수 있는가, 이런 꿈을 꾼다. 그쪽으로 진로를 정해서 좀 열정을 가지고 꿈을 키우는 소중한 시절이 되어야 하는데 등록금 걱정, 스펙 쌓기, 아르바이트도 해야 한다. 졸업을 하면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걱정으로 부모님한테 여러가지 눈치도 보게 된다. 힘든 생활을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들이 가진 고민을 제가 덜어 드리려고 한다. 그것은 학생여러분들의 행복을 삶을 위해서 아주 중요하지만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잠재력, 창의력 이런 것을 최대한 마음껏 발휘하면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나라의 미래성장동력이다. 그렇게 안 되면 우리나라의 미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여러분이 걱정하는 등록금문제, 취업문제 이런 부분은 제가 반드시 덜어 드리겠다. 마음껏 젊음의 열정과 꿈을 키워가고 미래 계획을 세워갈 수 있도록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다.

 

ㅇ 다시 국민들 앞에 서게 된 이유를 말하다.

 

Q11.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들과 청와대를 떠났는데 어려움은 없었는가.
- 어려움이나 불행은 연이어서 온다는 서양속담이 있다. 그렇게 큰 비극을 맞고 나서 숨돌릴 시간도 없이 그 어떤 시절에 대한 엄청난 매도라든가 여러 가지 배신이라든가 하여튼 그렇게 계속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미치지 않고 산 게 기적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하나는 이것을 극복해서 이기는 방법, 다른 하나는 자포자기해서 완전히 타락을 해서 아주 맘대로 살고 술 마시고 잊어버리고 가는 방법이 있을 텐데 제가 그렇게 교육받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에 질수는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수필을 많이 썼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혼자 명상도 많이 하고 지방 같은데 혼자 돌아다니고 유적지도 찾아가면서 자기마음을 다스렸다. 책도 엄청 많이 읽었다. 옛날 고전이나, 마음 다스리는 책을 읽고 거기서 벌이 꿀만 꽃에서 뽑아내듯이 마음을 때리는 그런 글귀는 노트에 적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다시 보면 내가 거기에 적은대로 살고 있구나, 그것을 쓰면서 너무나 좋은 글귀를 적었다. 이렇게 살아야 돼 하면서 적었는데 그것을 마음속에 무의식중으로 계속 생각하고 산 것이었다. 그게 피와 살이 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통해 극복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Q12. 다시 국민들앞에 서게 된 계기는?

- 그것도 IMF관리체제로 들어갔을 때, 남일 보듯이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살아온 환경이 이것은 우리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란데, 가난하다가 수많은 사람이 피땀 흘리고 어렵게 만든 나라인데, 이렇게 망할 수는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차타고  가다가 눈물이 붉어지고 저도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정치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 하시는 것을 보니까 어머니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내조하시면서 자유도 너무 없고 자기의 사적인 생활도 없고 항상 나라 전체를 생각하면서 봉사하면서 절제하였다. 아버지도 자유 없이 막중한 책임 때문에 하시는 것을 딱 보면서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런 사태를 당하고 나서 ‘이게 아니다, 다시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는데 내가 어떤 일조라도 해야지 또 일을 할 때가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할 수 없는 때가 되면 굉장히 저스스로를 자책할 것 같았다. 그때 용기를 내서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Q13. 정치 입문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는가.

- 고비고비 어려운 일이 많았다. 정치라는 것이 사실은 쉽게쉽게가면 그렇게까지 힘들지않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정치를 하러들어올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다 국민들께 삶이 나아지도록 좋은 더 안전하고 행복한나라가 되도록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많이 하고 해내지 못한다면 뭐 때문에 그런 정치를 하겠는가. 자유도 있는 다른 분야가 있는데 왜 하필 정치를 하겠는가. 자기의 정치적인 소신을 지키려다보니 그걸로 구박도 엄청 받았다, 그걸로 흔들어대고 그 생각을 왜 안바꾸냐해서 했다. 근데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하는 신념이다. 예를 들면 세종시 문제가 대표적인 예인데, 그것도 약속했지만 하도 주변에서 이러니까 제가 뭐 힘들게 그러냐 하고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그것을 결정하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했다.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서 선거 때나 그곳의 주민들께 진정성 약속을 했는데 그것을 어렵다고 해서 나몰라 한다면 내가 차라리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런 식으로는 안된다고 해서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지켰다. 지킬 것은 지켜야 뭐가 되지, 그냥 편하게 편하게 한다면 하나도 되는 것이 없다. 또 당이 잘못을 해서 문을 닫을 뻔 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때 저보고 맡아서 당을 살려라 했다. 근데 주변에서 저를 위한다는 분들은 이 선거는 100% 지는 것인데 괜히 책임지고 나섰다가 정치생명도 끊어진다면서 이런거 나서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럴 때 내가 나서서 당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당이 어떻게 한 당만 있을 수 있는가. 자유민주주의에서. 야당도 있어야하고 여당도 있어야하고 한 당이 완전히 없어진다, 이것은 안된다. 그리고 또 견제도 해야되지 않는가. 여러 가지로 저 당이 혼자 200석 가져가면 문제가 많다는 우려가 많았다. 그렇다면 국민들께 호소해서 내가 안되면  책임을 지더라도 한번 최선을 다해보자고해서 그래서 나섰다. 고비나 결정,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한다, 내가 정치를 하러 들어온 이상, 국민들께 드린 약속은 꼭 지키고, 신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게 해나가야한다는 것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지금은 후회는 없다. 또 제가 대선 후보로 나서기까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제가 그 옛날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국민들께서 엄청나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셔서 내가 그 최대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있었다하는 것에 대해서 꼭 보답을 해드려야 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러를 당해서 지금도 뚜렷하게 칼자국이 있는데 목숨을 잃을 뻔 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도 국민들의 위로와 격려가 힘이 됐다. 그래서 당을 살릴 적에도 국민이 미워도 다시 한번 믿어주셨다. 이렇게 저희가 꼭 하겠다, 이런 것은 이렇게 고쳐서 이런 나라 만들겠다. 그 약속을 다 지켜야한다. 그게 보답하는  것이다. 그걸 하려면 내가 한번 나서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또 제가 갖고 있는 꿈이 있다. 제가 정치를 하면서 정치도 이렇게 바꿔야하고 또 지금 국민의 삶이 너무 어렵다. 청년, 중장년, 베이비부머, 나이드신 분들은 노후가 너무나 걱정이 되고 여러 가지볼 때 국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수 있는 그런 나라의 틀을 확실하게 만들어 놓고 싶다. 그리고 정치를 마칠 수 있다면 내가 얼마나 보람이 있고 기쁠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한번 그런 꿈을 갖고 이렇게 나온 것이다.

 

Ⅱ. 박근혜 후보에게 직접 묻고 직접 듣는다! (현장에서 받은 포스트잇 질문을 무작위로 뽑아 답하다)

 

Q1.박근혜 펀드가 다음주 출시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 많이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다. 펀드 참여하시게 된다면 자신의 소중한 뜻을 담은 것 아닌가. 관심을 갖게 되니까 그 자체가 하나의 선거운동이 되는 것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다.

 

Q2. 여성가족부에 대한 생각은?

- 여성 가족부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여성에 대해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남성들이 역차별 받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여성이 가정에서, 어머니가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고 보육, 교육 걱정 없이 잘 생활하게 되면 여성의 행복이 결국은 남편에 대한 내조라든가, 어르신들도 편안하게 모시게 되고, 자녀들도 잘 키우고, 그런 생각에서 여성문제는 행복한 여성으로부터 대한민국 행복이 시작되지 않는가 해서 막중하다고 생각한다.

 

Q3.취업성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직무능력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자질, 소질보다는 외모 같은 것을 가지고 취업성형을 하는 관행은 바로잡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스펙을 가지고 따지는 세상이 됐다. 스펙 자체가 나쁠 것은 없지만 스펙을쌓아야 하는 환경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시간 뺏기고, 굉장히 돈도 많이 든다. 이런 것도 문제다. 자기가 갖고 있는 열정, ,끼 를 가지고 직무능력을 평가를 받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인재정보를 인재은행에 등록을 하는 것이다. 구직과 구인이 미스매치가 많다. 인재를 찾는데 직업을 못 구하는게 심한 것 같다. 인재은행에 등록이 된다면 ‘아 이런젊은이가 있구나’해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제도 정착을 하려고 한다. 학벌, 스펙보다는 열정, 잠재력, 훈련, 교육을 통해서 일터를 찾을 수 있다. 직무능력표준을 만들려고 한다. 직무능력을 표준으로 할 때 한 900개 정도 표준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머지도 표준을 만들어서 이제 직무능력만 보고 거기에 맞춰서 일터를 구할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러면 사람의 직무능력을 중시하게 된다. 하도 사교육 하다보니깐 직무능력개발을 하는데 돈이 또 드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단시간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고 능력이 평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학원에 다닌다고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부분부터 우선 실시하려고 한다. 민간에서도 풍토가 연결이 된다. 세월이 갈수록 학벌, 스펙보다는 능력과 잠재력, 열정을 보고 뽑는 것이 정착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Q4. 어머니가 그립지 않은가?

- 그립죠. 그립고 일생 그리울 것이다 .사실 어머니가 굉장히 일찍 돌아가셨다. 만 48세 에 돌아가셨다. 저한테는 항상 어머니가 그립고 어머니가 생전에 주신 말씀 같은 것이 은연중에 언행에 일생 미친다고 생각한다. 자애로우셨고 어떤 교육에 있어서는 굉장히 엄격하게 가르쳐주셨다. 그런 것에 대한 감사함, 존경심, 어머니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마지막에 저한테 남길 말도 못 들었다. 갑작스럽게 굉장히 비극적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Q5. 어머니가 그리울 때 어떻게 이겨내는가?

- 가르침을 간직하고 정신없이 살고 있다.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할 시간도 없다. 하도 매일 해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바쁘게 살고 있다.

 

Q6. 등록금 부담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실제로 등록금 부담을 반으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반으로 소득을 연계해서 소득계층 중에 어려운 하위 10%인 경우에는 무료로 하고 나머지는 소득연계해서 하면 반으로 줄일 수 있다. 학자금 대출이자가 4.9%인데 우리가 3.9%로 낮췄다. 실질 금리가 0%가 되도록 이자부담도 줄여드리려고 한다. 대학도 노력해야한다. 회계투명성에 같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한다. 일반 학자금 대출받은 분들도 있다. 이분들 어려움 해소를 해야 한다. 그런 분들의 학자금 대출을 ICL로 바꾸는 계획을 통해서 부담도 들어드려고 한다.

 

Q7. 본인과 나경원 전 의원 중 누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가?

- 저는 별로 예쁜 사람이 아니다. 나의원님이 미인이시고 비교를 하면 안된다.

 

Q8.후보가 생각하는 행복은?

- 여러 가지 표현할 수 있겠지만 가족이 건강하고 편안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갖고 몰두할 수 있을 때 그게 행복이 아닌가 한다.(박수)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뜻이 아닌가.


ㅇ 금일 이 자리에는 송희영 건국대 총장, 한국대학생포럼 박종섭 회장·문유진 부회장·김도윈 기획실장·이진규 대외협력실장·황현영 방송국장·김수민 조직국장·김경준 홍보국장·김재윤 서울대표·백원효 대구대표와 많은 학생들과 윤상현 수행단장, 박대출 수행부단장, 김상민 청년본부장, 전지명 조직총괄본부 공보전략위원장, 정승학 조직총괄본부 수도권위원장 이 함께 했다.


2012.  11.  15.
새누리당  대변인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