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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대표최고위원, 박종철 열사 24주기 박종철 기념관 방문 주요내용[보도자료]
작성일 20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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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2011. 1. 14(금) 11:20, 박종철 열사 24주기를 맞이하여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내에 있는 박종철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그 주요내용에 대해 황천모 상근부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ㅇ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로 악명 높던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내 박종철 기념관 방문에 앞서 “예전에 현장검증을 하러 왔을 때 욕조가 있는데 그대로 보존하도록 했다. 24년이 되었다. 점점 잊혀져서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한 젊은 영혼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는데 숭고한 뜻이 너무 빨리 잊혀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기념사업관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라고 심정을 밝혔다. 또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그 당시 대공분실이 무서운 곳이었다. 여기 들어오면 무조건 고문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에 조사하고 자백을 받았다. 자백을 하면 자백하는 대로 부인하면 부인하는 대로 과거 5공 말기에 고문하던 시절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 한편, 박종준 경찰청 차장은 “2005년도에 경찰 창설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대공분실로 써오던 것을 인권보호센터로 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반성도 하면서 경찰이 그 사건을 계기로 인권을 더 중시하는 경찰로 거듭나자는 의미에서 인권보호센터로 바꾸고 4층에 기념관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ㅇ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층에 보존된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현장을 찾아 박종철 열사의 영정 앞에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조한경 경위가 앉아서 조사를 하고 박종철 열사가 조사를 받았다. 경찰 보고는 ‘조사를 받던 중에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다’고 거짓말 했다. ‘박종운이 어디 있느냐’고 소재를 찾으면서 고문을 시작했다. 이 욕조에서 3명이 고문을 했는데 여기(욕조 턱)에 목이 걸렸다. 목이 걸린 상태에서 막 눌렀다. 물을 채워놓고 목을 누르니까 발버둥 치면서 질식사를 한 것이다.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을 어떻게 밝혀냈는가 하면 목 부분에 눌린 흔적이 이 욕조 턱과 같았다. 그리고 폐에 물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물을 마셔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폐에 공기가 못 들어가서 질식사한 것이다. 여기서(당시 고문실)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결국은 사망을 했다. 여기서 용산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사망한 채였다. 제가 용산병원에서 부검을 한다고 했는데도 경찰이 그때 말을 듣지 않았다. 자기들 마음대로 한양대 병원에 박종철 열사의 사채를 옮겨놓았다. 한양대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할 수 없이 제가 한양대 병원으로 갔다. 제가 서울대병원 의사를 지정했는데도 들어가서 보니까 서울대병원 의사는 오지도 않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의사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유명한 황적준 박사이다. ‘서울대병원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는데 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의사가 왔느냐. 같은 경찰조직 아니냐. 어떻게 공정한 부검이 되겠느냐.’ 이렇게 내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인 황적준 박사가 왔으니까 여하튼 부검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검실에 경찰이 하도 많이 들어와 있어서 묵념을 한 후, 전부 다 내보냈다. 부검실에는 저하고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 조수, 사진사 등 4명이 남았다. 그리고 경찰을 모두 내보내고 두 사람의 증인을 제가 참여시켰다. 그 두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박종철 열사의 삼촌인 박월길씨와 당시 한양대 병원 당직 의사이다. 부검을 하면서 피멍이 든 자리 등 하나 하나 사진을 찍었다. 두 시간 가량 부검을 했다. 부검을 한 후 물고문 하다가 욕조에 턱이 받혀 사망을 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바로 부검의로부터 진술 조사를 받았다. 받아서 증거를 확보하고 찍은 사진 모두를 증거로 확보했다. 끝난 후 황적준 박사는 치안본부에 가서 심장마비로 하라는 많은 압력을 계속 받았다. 나는 돌아와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 같다고 상부에 보고를 했다. 제가 목격자 두 사람을 참여 시킨 것은 아무리 부검을 제가 열심히 잘한다고 해도 결국은 과거의 많은 의문사처럼 심장마비나 자살로 위장되어 끝나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한다고 해도 5공 말기에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이었다. 틀림없이 심장마비로 하라고 제가 압력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목격자 두 사람을 거기에 참여시키고 경찰을 다 내보낸 것이다. 삼촌과 당직의사가 부검을 지켜본 후 나가서 기자들에게 전부 본 것을 다 얘기했다. 기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 조간에 ‘모두 피멍이 들었다. 박종철군 온몸에 피멍’으로 대서특필되어 세상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저는 다음날 안기부에서 오라고 하여 갔더니 ‘이것을 심장마비로 묻을 수 있겠느냐’고 얘기를 해서 제가 ‘묻을 수 없다. 이미 언론을 통해서 고문 당한 게 드러났는데 어떻게 이것을 묻을 수 있느냐’라고 했다. 기자분들의 힘에 의해서 결국은 모든 언론에 보도되니까 안기부에서도 어쩔 수 없어서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진실을 밝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고 또 6·29선언을 가져오고 군사정권이 몰락하게 된 그런 계기가 되었다.

 

- 제가 24년 전의 얘기를 하는 것은 이러한 박종철 열사의 위대한 희생정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열망 이런 것이 점차 세월이 가면서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우리 후배들의 가슴 속으로 면면이 이어져 오기를 바란다. 그런 정신에 의해서 국가가 더 발전하고 정의가 살 수 있다고 본다. 제가 기념관을 방문한 것도 24년 전의 일과 오늘 24주기이기 때문에 추도를 하기 위해서 왔지만 한편으로는 후배들이, 자라나는 학생들이 박종철 열사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그 분을 영원히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 오늘날 우리가 완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도 박종철 열사 같은 수많은 희생과 이분들의 피의 대가, 목숨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 감사 이런 것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오늘 이 자리에 꽃도 많이 갖다 놓으면 좋겠는데 그 동안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잊혀져서 과거와 같이 많은 분들이 오시지 않고 있는 것이 마음 아프다. 당시 조사실이 이 형태 그대로이다. 이 조사실에서 무수한 민주의사들이 고문을 당했다. 조사실 전부가 다 그랬다. 이곳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역사 현장으로 보존되어 있다.

 

ㅇ 이후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씨를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4층에 마련된 박종철 열사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벽에 게시된 5·18 광주민주화 운동 관련기사를 보면서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제가 5·17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때에 전북대학교에 계엄군이 주둔했는데 그 때 최초로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쫓기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이세종이라는 학생이 있다. 그것이 최초의 희생이다. 그 때 제가 그것을 수사할 때 계엄사령부에서 제대로 수사를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바로 이 박종철 열사의 사건을 수사할 때 밑거름이 되어 제가 목숨을 걸어놓고 철저하게 수사를 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또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은 당시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 기사를 보면서 “처음에 두 사람(당시 고문경찰관)을 구속하게 될 때까지는 1987.1.14에 사망하고 다음날 1.15에 제가 부검을 해서 진실을 밝혔는데 사실 그 이후에 굉장히 경찰과 검찰의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경찰관을 구속하는 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제 기억으로는 19일에 구속되었다.”라고 하였다. 기념관에 있는 유품들을 둘러보며 “목도리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라고 예전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면서 옆에 있던 당시 박종철 열사의 선배였던 박종운씨를 보고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빚이 많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저의 책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는 그 때 동아일보에서 발간을 했는데, 당시 수사하면서 일기를 다 썼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해서 6월 항쟁까지 상세한 과정을 적었다. 그것이 6월 항쟁의 교과서로 되어있다. 제가 그것을 가지고 건국대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6월 항쟁에 대해서는 그게 가장 정확하게 기술한 책이다. 동아일보에서 판권이 끝나고 지금은 내가 발간하면서 ‘안검사의 일기’로 발간했지만 현재는 절판이 되어있다. 금년에 재발간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할까 생각 중이다.”라고 하였다. 또 기념관에 전시된 여러 사람들의 편지를 보면서 “이 편지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책에서 인용을 했다. 참 순진무구한 젊은이고 가족을 사랑하는 애틋함, 누나와의 대화 이런 것들이 편지 속에 들어있었는데 굉장히 착한 젊은이가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사망했던 것이다. 참으로 아깝고, 비통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고 앞으로 우리 많은 젊은이들이 기념관에 와서 많이 좀 보고 생각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지금은 너무 많이 잊혀졌다.”라고 하였다.

 

ㅇ 금일 이 자리에는 안상수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하여 원희목 대표비서실장, 안형환 대변인, 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씨, 당시 선배였던 박종운씨, 박종준 경찰청 차장, 장신중 경찰청 인권보호 담당관, 김일태 경찰청 감사관이 함께 하였다.

 

 

 


2011.   1.    14
한  나  라  당   대  변  인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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