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생각과 행복이 최우선인 국가정책, 국민의힘이 만들겠습니다.
평등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은 이론적으로 사회적 훈련을 받고 투표권을 갖게 된 순간부터 헌법을 기초로 이루어진 법치 안에서 누구나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이는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장애를 갖게 된 사람과 정상인들은 최소한 정치에 대한 권리의 가치가 다르게 보지 않는다. 이는 개인, 법인, 장애인 단체 등 누구라도 합법적인 선에서 교섭할 수 있는 루트를 통해 주장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의 대한민국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 같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은 가장 바쁘면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지옥 같은 시간 때에 지하철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시위를 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법적인 방식이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그들이 방해한 사람들은 경제적 활동을 하고 나라에 세금을 내는 주요 납세자며 장애인을 위한 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 돈을 내는 사람이다. 지각하면 돌아오는 상사의 눈초리, 중요한 고객을 만나는 미팅에 늦게 된 상황, 가족 중 누군가가 위급해서 지하철 타러 왔더니 버스 타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상상만으로도 지옥이다. 상황을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인 경찰은 장애인 탄압했다는 이미지를 얻을까봐 어쩌지 못하고, 사회 지도층 특히 정치권에서는 장애인 단체와 대립하며 약자 멸시라는 이미지가 갖는 것이 두려워 한마디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정도면‘착한 사람’이고 싶고, 모난 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거의 사회를 마비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생각하면 비약일까? 권위를 지닌 사회지도층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준석 대표가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여권은 당연히 ‘오죽하면 그랬겠냐고’논리로 날선 공격을 하고 같은 야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언론을 통해 이준석 대표가 지나쳤다거나 잘못했다고 말할 뿐 그들의 행동이 잘못하고 있다는 말을 난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전장연의 해당 시위는‘오죽하면’그럴 수 있는 행동의 선을 이미 한참 넘었으며,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더 차별적인 시선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은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단순히 불편한 부분이 있는 우리의 이웃이지 정상인과 다른 권리를 지닌 성역’이 된 초법적 인권이 아니다. 지난 5년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성역으로 이루어진 절대 방패가 얼마나 큰 사회적 부작용을 일으켰는지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자동화 업계의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약 7년을 몸담았다. 그 중에 담당은 아니었지만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을 위한 웨어러블 로봇의 국내 사업화를 위한 업무를 도왔던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부승인을 득하는 과정에서 상업화를 포기했다. 나는 이러한 논리 속에서 우리의 권리를 대신하는 정부, 어쩌면 우리 사회 스스로가 장애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느껴져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끝난 기억이 있다.
관이 요구한 기준은 해당 기기를 사용하다 부상을 당하는 장애인이 한건도 없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해당 로봇은 자이로 센서가 가장 핵심 장치로 몸을 기울기를 인지하여 로봇이 걸음을 걷는다. 인간의 다리에는 엄청나게 많은 신경이 척추에 연결되어 있다. 다리를 기계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신경다발 하나하나는 센서의 역할을 하는 정교한 장치이다. 걷는 다는 것은 이러한 장치를 통제 한다는 의미이며 우리는 걷기 위해 수 없이 넘어진 상처가 무릎에 조금씩 남아있을 것이다. 그 상처 하나하나는 실패 속에서 다시 일어난 걷는 훈련을 한 흔적이다. 이러한 인간이 다리의 기능을 잃으면 마법이 아닌 이상 몇 개의 센서도 없는 기계로 걷기 위해서 험난한 신고식을 거쳐야 적응을 한다. 새로운 방식의 걷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 도전과 좌절의 연속을 맞보는 대가이다. 물론 장애인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정부의 시선이 이해는 갔지만, 해당 기기의 대상이 지적 문제가 아닌 다리가 문제가 생긴 성인인데 정부의 시선자체가 자식을 지나친 과보호하여 뭔가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학부모를 보는 것 같았고,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도전할 권리를 너무 쉽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며 생각해본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이다.
역사를 보면 인류는 시련을 꽤 여러번 만났지만 이겨냈다. 특히 자유 세계의 국가에서 끝없는 시도 속에 실패를 보안하는 과정이 때로는 진보라는 기적과 같은 결실을 나타나는 것을 꽤 많은 예시로 배운다. 어쩌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은 지금과 같은 잘못된 것에 비판조차 어려워 숨죽이는 사회가 아니라 이러한 편견으로 인한 과보호의 시선을 덜어내고 시민들을 자유롭게 하는 정부의 평등한 시선과 과학, 기술, 자본의 힘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도전을 하려는 기업가와 시련을 이겨내는 장애를 갖은 개인들의 노력에 정답이 숨어있을 것 같은 건 나만의 생각일까?
※ 본 기고문은 국민의힘 공식 의견이 아닌, 청년당원 개인의 의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