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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정책위 공식 논평 및 보도자료입니다.

홍준표의원-대정부질문(사회,문화분야) 2
작성일 2003-10-23
(Untitle)


<별첨 1>

민주당 분열 일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2003년 1월 2일 민주당 신년인사회 중 지도부 교체 불가피 발언으로 촉발된 민주당 분당 사태는 근 9개월 여간(약 260일)의 신당놀음 끝에 2003년 9월 20일 소위 노무현당이라고 불리는 국민참여통합신당 주비위원회를 출범시킴.


2003년 1월 2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민주당 신년인사회에서 인적청산은 배제하되 지도부 교체는 불가피하다는 말로 당 개혁방향을 설정.

2003년 2월 18일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신주류측을 겨냥해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당을 떠나라”고 요구하고 신주류측의 신기남 의원은 지도부 조기사퇴와 ‘개혁신당’ 창당론을 내세우는 등 양측간 갈등 심화.


2003년 3월 26일
신주류 좌장격인 김원기 고문이 ‘신당’ 가능성을 거론.

2003년 4월 28일
민주당 신주류측이 연쇄모임을 갖고 4.24 재보선 참패로 제기된 ‘개혁신당’ 창당을 겨낭한 공론화에 본격 착수. 이에 구주류는 “민주당을 지역당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라며 반발.
2003년 4월 30일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한 신당창당을 모색중인 신주류 의원들은 “신당 창당이 대세로 굳어졌다”며 세규합에 속도를 냄.
민주당 구주류 및 중도파 의원 20명은 신당논의와 관련, ‘당내 통합’과 ‘민주적 논의’를 강조하며 신주류측의 신당 드라이브에 제동.

2003년 5월 2일
민주당 정균환 원내총무는 신주류측의 신당 창당 움직임과 관련, “민주당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살려가면서 외연을 넓히는 통합신당에 찬성한다”고 말함.

2003년 5월 16일
민주당 신주류측은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신당 창당 관련 워크숍을 열어 천정배, 배기선 의원의 발제를 통해 신당 창당 이념과 절차 등에 대한 기본구상을 밝힘.

2003년 5월 28일
민주당내 신당파는 국회에서 ‘신당추진모임’ 2차 모임을 갖고 신당추진기구에 소속의원 및 당무위원 전원을 참여시키기로 하는 등 인적청산과 당 해체 주장을 사실상 철회.

2003년 7월 3일
민주당내 신주류가 신당추진기구를 공식 발족시켜 독자 신당추진을 강행키로 하고, 구주류측이 이를 ‘해당행위’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서 당내 신당갈등이 중대고비를 맞음.

2003년 8월 12일
민주당의 신당 논의가 ‘임시 전당대회냐 막후 타협이냐’라는 일대 분수령을 맞고 있는 가운데 권노갑 전 고문이 현대 비자금 수수 의혹으로 전격 체포됨에 따라 돌연 ‘안갯속’에 빠짐.

2003년 8월 13일
민주당 신주류 좌장인 김원기 고문이 개혁신당추진연대회의(신당연대) 조성래 상임대표와 전격 회동, 신당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나 각각 통합신당론과 개혁신당론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그침.

2003년 9월 17일
노무현 대통령은 광주?전남지역 언론과의 합동 간담회에서 민주당 분당사태와 관련, “나는 민주당이 갈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개혁되기를 바라는데 개혁을 찬성하는 사람과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것”, “옛날 그대로 가지고 그냥 가서는 … 민주당이 전국정당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함.
또한 신당과의 관계설정 질문에 대해 “(민주당이) 뜻을 모아 개혁하는 정당으로 가길 바랬다. 이를 호남에 대한 배신으로 덮어씌우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함.

 

2003년 9월 23일
노무현대통령은 민주당 분당과 관련,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현상이 한국 민주세력의 분열이나 민주세력의 약화로 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왜곡된 정치구조가 새로운 구조로 바뀌기 위해 일부 질서가 해체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함

2003년 10월 7일
통합신당의 “호남민심관련 홍보논리(안)’에 따르면 통합신당측은 노 대통령 당적 문제와 관련해 ‘잔류 민주당이 떠나보낸 노 대통령이 다시 통합신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호남 유권자 여러분이 도와 달라’는 홍보 문구를 마련. 또 다른 홍보 문구는 ‘노 대통령을 구하지 않으면 김대중 정권의 개혁과 남북화해협력시대가 무산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당당히 통합신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는 내용.

2000년 10월 18일
노 대통령이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하기 전날 김원기(金元基) 창당주비위원장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 하고 "앞으로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힘.

 

 

 

 

<별첨 2>

필리핀 에스트라다 대통령 사임 일지


   ▲ 2000.10.9 뇌물스캔들로 인한 사임 압력
                야당의 탄핵안 제기 발언, 시민단체의 퇴진 운동 등
 
   ▲ 2000.10.18 야당 의원들 탄핵안 제출
                  아로요 부통령 사회복지장관 사임 후 야당과 연합전선                    선언

   ▲ 2000.11.3 하원 여당 40여명 탈당 선언, 탄핵재판 회부에 필요한    73명을 훨씬 넘어선 90여명 확보

   ▲ 2000.11.13 하원으로부터 공식 탄핵을 당해 대통령 중도사퇴 결정   권이 있는 상원으로 탄핵절차가 넘어감

   ▲ 2000.11.28 상원은 대통령 변호인들의 탄핵소추 각하신청을 기각하   고 12월 7일 탄핵심판 개시할 것이라고 밝힘

   ▲ 2000.12. 7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상원 탄핵 재판 개시
                  (뇌물수수와 부정부패, 국민 기만, 헌법 위반 등)
  
   ▲ 2000.12.24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사임설을 일축하고 탄핵재판을 빨리 종결시키겠다고 밝힘

   ▲ 2001.1.17 상원이 비밀계좌추적 불허하자 야권과 시민들 항의시위

   ▲ 2001.1.18 필리핀 언론이 에스트라다의 비밀계좌 폭로

   ▲ 2001.1.19 필리핀 군부가 개입, 대통령 퇴진 요구 움직임을 보이자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조기 대선 실시 약속 발표, 사실상   사임과 권력포기를 선언했으나 야당은 이를 거부 즉각    사임발표 촉구.

                이날 사임을 요구하는 국민의 대규모 시위와 군부와 경찰의 지지 철회, 정부 각료의 이탈 등으로 에스트라다 정권의 사실상 붕괴.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장기집권 후 피플파워에 의해 물러났던 상황과 유사.

 

 

   ▲ 2001.1.20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사임하고 헌법상 권력계승   권자인 아로요 부통령이 새 대통령으로 취임.
■ 1998. 6. 영화배우 출신인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과거 문란한 사생활로 자질시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민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집권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계속 상승하였으며, 99년 상반기에는 70%대의 높은 지지를 획득했으나, 집권 2년째를 맞아 99년 3/4분기 이래 지지율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지지율의 하락 배경으로는 대중의 인기를 업은 대통령이 국정운영에 있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며, 부정부패, 측근 인사관련 스캔들, 저조한 개혁실적 등이 주요 문제점으로 거론되었다. 계속된 경제난과 국정운영 실패에다가 도박업자들로부터의 뇌물 수수 의혹까지 겹쳐 하원으로부터 탄핵을 받게되고 필리핀의 ‘피플파워’는 결국 마르코스를 쫓아낸 지 15년 만인 2001.1.19 다시 부패로 얼룩진 에스트라다 정권도 끌어내렸다.

 

■ 에스트라다 [ Estrada, Joseph Ejercito ]

필리핀의 영화배우 . 정치가.

1937년 4월 19일 필리핀의 마닐라 수도권의 빈민가인 톤도(Tondo) 지구에서 태어났다.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아테네오마닐라대학교(Ateneo de Manila University)와 마푸아공과대학(Mapu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교육을 받았다.

1950년 후반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배우가 되어, FAMAS 최우수남우상을 5차례 수상하고, 1981년 FAMAS 명예의 정당에 등재되었다. 영화 속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지와 주먹을 쓰는 주인공 역할을 주로 맡아 타갈로그족 영화팬들의 인기를 얻었다. 이런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1969년 산후안시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86년까지 17년 동안 시장을 연임하였다.

1987년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 후보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92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농촌개발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활동했으며, 1992년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라모스와는 다른 정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5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4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별첨 3>

노무현정권 친인척 . 측근 . 권력자
비리 의혹 일지

 1) 2.26  노건평 인사청탁 파문 사건
 2) 4.30  염동연 민주당 인사위원 나라종금 관련 사건
 3) 5.24  안희정 노대통령 측근 나라종금 불법로비 사건
 4) 6.18  박지원 전 청와대비서실장 수뢰 사건
 5) 6.23  생수회사 장수천 관련 비리의혹 사건
 6) 6.23  용인 이기명씨 땅 1차 매매계약서 조작의혹 사건
 7) 6.23  용인 이씨 형제 땅 개발 관련 특혜의혹 사건
 8) 6.23  거제 구조라리 국립공원내 별장 ? 까페 불법건축의혹 사건
 9) 6.23  노건평 강제집행 면탈 및 증여세 포탈의혹 사건
10) 6.23  진영?거제 땅 명의신탁 및 투기의혹 사건
11) 6.23  진영상가?땅 관련 공증증서 조작의혹 사건
12) 6.23  권양숙 여사 대연동 아파트 투기의혹 사건  
13) 7. 2  정대철 굿모닝시티 분양비리 관련 사건
14) 8. 3  양길승 대통령 제1부속실장 향응파문 사건
15) 8.10  키스나이트클럽 이원호 관련 대선불법자금 사건
16) 8.15  권노갑 현대대북사업 지원대가 200억원 및 3천만불
          수뢰 사건
17) 10.2  썬앤문 관련 이광재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금품수수 사건
18) 10.3  썬앤문 문병욱회장 대선불법자금 의혹 사건
19) 10.8  SK비자금 관련 최도술 총무비서관 사건
20) 10.8  SK비자금 관련 이상수의원 불법대선자금 수수의혹 사건

 

<별첨 4>
노무현정권 무능 일지

 

□ 2003. 3.
           - 신용카드대란
           - SK 글로벌 분식회계사건으로 인한 금융위기
           - 북한산관통 서울외곽순환 고속도로, 경부고속철도
              노선문제, 경인운하 등 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한 혼란 심각
           - 대북송금 특검연장 거부로 부패은폐
           - 이라크 파병 동의안 관련 무책임 ? 무소신으로 국론분열

□ 2003. 6. 
           - 화물연대 운송거부 파업과 물류대란
           - 철도파업사태
           - NEIS 교육행정시스템 대란
            
□ 2003. 7. 
           - 부동산 가격폭등과 전세대란,
           - 과도한 카드 빚으로 인한 가계 파산
           - 일가족 생계비관 동반 자살사건의 잇따른 발생
           - 전북 위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관련 집단 반발 사태

 


□ 2003. 8.
           - 실업률 고조, 특히 청년실업률 사상최악,
           - 경기침체로 인한 중소기업의 연쇄부도
  
        
□ 2003. 9.
           - 잦은 비와 냉해로 사상 최악의 흉년위기
           - 국민들의 체감경기가 지난 외환위기 이후 최악(한국은행)
           - 20, 30대의 70% 이상 이민 희망
           - 태풍매미 남부지역 강타
              * 대통령은 삼청각에서 뮤지컬(인당수 사랑가) 관람
              * 김진표 경제 부총리는 제주도 골프 여행

□ 2003. 10.
           - 노대통령의 재신임 정국, 사회?경제 불안 가중
           - 이라크 추가 파병으로 국면전환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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